병원에서 "이제 성인이니까 소아과는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뇌성마비를 가진 분들 중 상당수가 성인이 되면서 갑자기 의료 공백을 경험합니다. 저도 처음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던 주치의가 있었는데, 성인이 되자마자 "이제 다른 병원 찾아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막막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4,000명 이상의 뇌성마비 성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료 시스템 자체가 성인 뇌성마비 환자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겁니다.
소아에서 성인으로, 전환기 의료 공백의 충격
뇌성마비(Cerebral Palsy, CP)는 출생 전후 뇌 손상으로 인해 운동 기능과 자세 유지에 어려움이 생기는 신경학적 장애입니다. 여기서 신경학적 장애란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어 신체 움직임을 조절하는 신호 전달에 문제가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분들이 뇌성마비를 아동기 질환으로만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의료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전환기(transition period)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환기란 소아청소년과 중심의 의료 서비스에서 성인 의료 체계로 넘어가는 시기를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뇌성마비 환자 절반가량이 성인이 되면 일반 GP(General Practitioner, 가정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전문 진료를 받던 환자가 갑자기 일반의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한 환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버려졌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냥 성인 병원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어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갑자기 낯선 곳으로 옮겨지면서 불안감이 심해졌고, 새로운 의료진에게 제 상태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점차 좋아지면서 나쁜 생각들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가끔 "갑자기 또 안 좋아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환기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 소아과와 성인과 간 체계적인 인수인계 프로토콜 구축
- 환자 본인의 자기옹호(self-advocacy) 능력 향상 교육
- 전환 전담 코디네이터 배치로 행정적 부담 경감
물리적 접근성, 장비 하나로 달라지는 진료 현실
의료기관의 물리적 접근성(physical accessibility)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여기서 물리적 접근성이란 휠체어 사용자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실제로 의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는지를 말합니다. 연구 참여자 중 한 명은 "높낮이 조절이 안 되는 진료대 때문에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기가 너무 무서웠다. 검사대에서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고 토로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이라면 당연히 장애인을 위한 장비가 갖춰져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높낮이 조절 진료대, 휠체어 탑재 가능한 체중계 같은 기본 장비조차 없는 곳이 많습니다. 제가 다니던 병원도 장애인 화장실은 있었지만, 정작 진료실 안에는 적절한 장비가 없어서 검사 자체를 포기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동 문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중교통 이용이 어렵거나 특별 차량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한 시간적·경제적 부담이 결국 진료 자체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한 보호자는 "병원 가는 데만 왕복 3시간,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정기 검진을 자꾸 미루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뇌성마비 성인 환자의 84%가 연간 GP를 방문하고, 65%가 치과를, 44%가 물리치료사를 방문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각 의료기관마다 접근성이 제각각이라면 환자와 보호자의 피로도는 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성 부족, "휠체어 탄 사람은 머리도 안 좋을 거야"라는 편견
가장 답답한 건 의료진의 뇌성마비 전문성 부족입니다. 한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휠체어를 보면 의사들이 자동으로 제가 지적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건 명백한 편견입니다. 뇌성마비는 운동 기능 장애이지, 인지 능력 장애가 아닙니다. 물론 중복 장애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뇌성마비 환자를 그렇게 단정 짓는 건 큰 문제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의료진이 환자의 말을 직접 듣지 않고 보호자나 활동지원사에게만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제가 거기 없는 것처럼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선입견이 깔려 있는 겁니다. 한번은 제가 직접 증상을 설명하려 했는데, 의사가 계속 옆에 있던 가족에게만 눈을 맞추더군요. 그때 정말 화가 났습니다.
성인기 뇌성마비 환자는 근골격계 통증(musculoskeletal pain), 조기 피로(early fatigue), 이차적 건강 문제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골격계 통증이란 오랜 기간 특정 자세를 유지하거나 비정상적인 움직임 패턴으로 인해 근육과 관절에 생기는 만성 통증을 말합니다. 또한 고혈압, 심장질환, 뇌졸중, 천식, 골관절염 같은 합병증 위험도 일반인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합적인 건강 상태를 이해하고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의료진 교육이 절실합니다. 한 연구에서는 의료진이 뇌성마비 환자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환자나 보호자의 설명을 무시하거나 상충되는 조언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게다가 병원과 지역사회 의료진 간 소통 부재로 인해 환자가 중복 검사를 받거나, 치료 계획이 엇갈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다학제 협력과 맞춤형 지원,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로 모입니다. 성인 뇌성마비 환자를 위한 통합적이고 지속적인 의료 체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동기에는 재활의학과, 정형외과, 신경과, 물리치료, 작업치료 등이 협력하는 다학제 접근(multidisciplinary approach)이 이뤄지는데, 성인이 되면 이런 팀 케어가 사라집니다. 다학제 접근이란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한 환자를 위해 함께 치료 계획을 세우고 협력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한 보호자는 "우리 아이에게는 제 목소리밖에 없어요. 제가 크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건 제도가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입니다. 환자 중심 의료(patient-centered care), 의료진 간 정보 공유 시스템, 장기 케어 플랜 수립이 필수입니다.
영국의 NICE(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 가이드라인은 이미 이런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출처: 영국 국립 다학제 팀 구성, 생애 주기별 맞춤 지원, 접근 가능한 의료 환경 조성이 핵심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가이드라인과 실행 체계가 절실합니다.
저는 하루하루 견뎌야만 하는 힘든 싸움을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언제쯤 좋아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심해질 때도 있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연구가 쌓이고, 제도가 바뀌면 다음 세대는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성인 뇌성마비 환자도 존엄하게,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참고: Blog: Health services fail adults with cerebral palsy: research shows what must change